일반적인 상상과 실제 사이에 차이가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다의 왕자인 상어는 인기(?) 못지않게 공포의 대상입니다. 많은 경우 약 2만 4천개까지 나는 이빨은 먹이를 단숨에 자른다고 합니다. 이 무시무시한 상어에게 희생당하는 수는 매년 약 40명 정도라고 합니다. 반면에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코코넛 열매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무에서 떨어지는 코코넛 열매에 맞아 죽는 사람이 매년 15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더 염려해야 할 것은 바닷가에 나갔을 때 상어가 아니라 해변의 코코넛 나무입니다.
두 주전 어느 저녁에 갑자기 콧물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쏟아지는 장마비같이 밤새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알러지가 심하게 생기는 것은 아닌가?’하고 걱정이 되었습니다. 약을 먹지 않고 버티다가 결국 새벽녘에 알러지 약을 두개나 먹었습니다. 콧물이 멈추는가 했더니 다음 날 저녁부터는 오한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팔만 움직여도 무섭게 떨게 하는 오한이었지만 기분은 좋아졌습니다. 감기야 며칠 앓고 나면 되지만 알러지는 평생 달고 다녀야 될 수도 있으니까요.
지난 몇 주간 ‘날샘’을 따라 묵상한 대로 다윗은 아들의 반란 등과 같은 여러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윗은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 정황(압살롬, 12지파, 아마사 등을 용서하려고 한 모습 등)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극복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받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밧세바의 사건은 분명히 죽을죄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가 감수해야 하는 무서운 징벌도 사실은 은혜였습니다. 반면 다윗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큰 죄인지는 잘 알았지만 은혜를 몰랐습니다. 10지파는 께름칙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결국 ‘솔로몬’이 죽고 난후 떨어져 나가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출신인 유다지파도 자신들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부담감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이 용서한 반란군 사령관 아마사를 요압이 죽이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극복된 반란으로 끝나지 않았고 나라가 깊이 병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갈등의 후유증이 며칠 앓고 일어나면 되는 감기처럼 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결국 알러지처럼 만성이 되고 말았다. 은혜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저희들이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은혜를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고 있는 은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고받을 수 있는(또 그래야 하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며 나누게 될 때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상처의 무게’로 부터 많이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다윗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