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담(?)이 될 때도 있지만 어떤 것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소중한 인생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이 있습니다. 아들이 어렸을 적(아마도 4세-5세), 함께 놀고 있는 중에도 “놀아줘.” “놀아줘.”라고 말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또래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외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조금 큰 후에는 카약을 두 어 번 같이 했습니다. 몇 년 전 몬트레이에서 처음으로 둘이 카약을 타고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봐야 해변을 멀리 떠나지 않는 항해(?)였습니다. 생각보다 빠르게 나아가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깥 바다 쪽을 향하게 되면서 겁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멀어진다는 것도 긴장하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파도가 커졌습니다. 돌아가고도 싶었지만 파도가 옆을 치면 카약이 넘어갈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먼 바다 쪽으로 나오자 손바닥으로 치는 듯한 파도는 만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안도를 할 때 쯤 또 다른 파도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카약 전체를 올렸다 내려놓는 파도였습니다. 신기하게도 엉덩이 하나만 얹어 놓을 수 있는 그 작은 카약이 그 큰 파도 위에서도 당당하게 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깊이의 바다 위를 그 작은 플라스틱 조각에 앉아 큰 물결을 타며 생각을 합니다. ‘인생을 사는 것은 이것보다 안전할까?’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듯이 무슨 일인들 쉽고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제가 참 좋아하는 찬양 중 ‘물 위를 걷는 자’(시와 그림)는 이런 가사입니다.

“주님 나를 부르시니/ 두려움 없이 배에서 나아가리라/ 주님
나를 부르시니/ 주님 내게 오라시니/ 주님 보고 계시기에/
의심치 않고 바다를 걸어가리라/ … / 주님 여기계시기에/
이 깊은 바다가 반석이 되고/ 주님 여기계시기에/ 반석 위를
내가 걸어가리라/ … / 주님 여기계시기에/ 저 거친 파도가
반석이 되고/ 주님여기계시기에/ 반석 위를 내가 걷습니다.”

조금씩 카약에 익숙해지고 배짱도 생기면서 배를 돌려 해안으로 돌아갑니다. 주님의 제자로 사는 것, 복의 근원으로 사는 것은 좁은 길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처럼 그런 믿음, 아니요 저금 더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말로 어떻게 표현이 될까요? 부활을 기념하는 날, 이 믿음이 더욱 분명해 지는 기회가 되길 소원해 봅니다. 사명자로서의 인생의 바다를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