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부터 주님께서 저희 교회가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에 대한 질문을 드리고 있었습니다. 기도 제목은 곧 관심과 헌신의 장(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매 주일마다 함께 드리는 기도제목 네 개 중 하나는 ‘양극화와 갈등이 깊어지는 사회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을 잘 할 수 있게 하소서!’입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이었습니다. 저희 교회의 비전(복의 근원이 되게 하소서!)과도 관계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분명 이 시대에 필요한 기도제목입니다. 올 해 미국만 하더라도 백인과 흑인의 갈등 문제는 더 커지기만 했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인 부익부 빈익빈 역시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미국의 가장 부자들조차 걱정을 할 정도입니다. 왜 이것만이겠습니까? 그밖에도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갈등과 경쟁이 사회를 더욱 건조한 긴장 속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여유, 넉넉함’이라는 말이 사실상 저희의 삶 주변에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저희들도 여유가 없으면서 어떻게 ‘사회 속에서 화평케 하는 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공허한 외침으로 끝날 것 같은 조급함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저희 공동체 모두가 함께 묵상하며 도전 받기를 원하시는 주제를 던져 주셨습니다. 바로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지난 5개월 정도를 이 은혜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처음 접한 것은 약 15년 전입니다. 그 때도 놀라운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긴 시간 함께 묵상하며 더욱 느껴 보았습니다.
지난 50여 년 간 겪은 미국 사회와 미국 교회의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가 20-30년 뒤쳐져 그 길을 따라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쌍둥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문제는 은혜입니다. 필립 얀시의 말처럼 은혜를 잃은 교회를 사람들은 떠나갑니다. ‘용서, 이해, 사랑’으로 은혜를 나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사회는 갈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21세기의 중요한 화두는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적 소명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슬로건이나 법안 등이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가 은혜로 충만하냐 아니냐가 승부처입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구원, 무한한 사랑)에 감동되어, 기쁨으로 그분께 주되심을 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은혜(용서, 이해, 사랑)를 베풀 능력으로 충만한 저희 교회와 지체들이 되길 소원합니다.